그냥일상/망상취미

파울 클레, 황금물고기,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그림

최상_서네 2018. 12. 21. 16:46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은 행복해서 다행이야.'

문득 나는 같이 웃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걸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가상인물들은 스토리 안에서 모두 조연이었다. 주인공의 친구, 주인공의 형제, 자매, 이웃. 내 스토리 상에서 주요인물들은 메인 스토리의 외전이라는 전제가 항상 붙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주인공으로 내 삶을 못 살고 있다는 의미일까? 상상속의 나를 대변하는 페르소나 조차 조연을 담당하며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운 걸까? 


하지만 조연으로서의 인물은 자신만의 인생이 있다. 그들은 실상 주인공을 돕거나 서포트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만의 주관성에 의한 것이다. 다만 누구의 논점에서 보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조연의 입장에서 주인공 인물은 그저 객체일 뿐이지 그 조연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의 청춘스러운 유쾌함은 내게 있어서 그 관계에 휘말려 있지 않은 안정감을 기분좋게 해주는 대상일 뿐이다. 


우리가 SNS를 보며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내가 조연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주인공같은 만들어진 허상을 부러워하며, 그에 맞지 않는다면 주인공이 되는 것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주관성을 가지는 것, 내 고유의 판단과 행동으로 삶을 이끄는 것이다. 무대에 올라야만 주인공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들처럼 웃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무대에 올라야 자신이 빛난다는 외부영향력에 의한 판단은 나를 조연으로 만들 뿐이다. 


인생의 주인공을 생각하자 떠오르는 그림이 한점 있었다. 




파울 클레(Paul Klee)의 황금물고기 또는 금붕어 (The Goldfish)

출처: wikiart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단 한마리의 거대한 황금물고기가 화면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그의 붉고 노란 컬러감은 마치 태양과도 같다. 수초조차 물고기의 빛에 반사되어 있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주변의 어둡고 작은 물고기들은 그를 피해가려는 듯 화면의 가장자리로 향하여 숨으려는 것 같다. 황금물고기의 눈동자는 붉고 명확하지만 다른 물고기들의 눈동자는 공허하다. 황금물고기는 갈 곳을 알고 있는 듯 조용하다. 그는 그 자신을 알고 있다. 작은 다른 물고기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느라 잔물결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 갈 곳을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는 듯이 보인다. 


이 그림은 클레가 1925년에 그린 것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수 시절 작품이다. 작가의 설명이 별로 없다고 하여 어떤 이는 이것이 종교적인 그림이라고도 해석한다. 내 생각으로는 황금물고기는 자화상적인 작품으로 당시 나치의 여론으로 공격받았던 본인을 비롯하여 실용성을 강조한 바우하우스가 받은 탄압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한다. 클레가 어떤 생각으로 그렸던 이렇게 빛이 나는 표현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은 그의 광학적 지식이 축적된 결과일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그림을 핸드폰 바탕화면에 옮겨 놓았다. 그들과 같이 웃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주인공인 셈이다. 황금물고기도 웃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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