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쓰고 느끼고/영화

영화 '조커' 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점 5가지

최상_서네 2019. 10. 24. 22:52

여러모로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조커'. 

다크라이즈 이후에 배트맨보다 더 인기가 많아진 것 같다. 

영화 조커

영화 '조커'는 한 인간이 악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매우 개인적인 조커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재미있는 점 5가지를 발견했다. 

 

1. 캐릭터의 변화, 융합

 먼저 아서 플렉/광대/조커의 관계이다. 영화는 시간 순서에 따라 아서플렉->분리된 두 캐릭터->조커로 변화한다. 

 초반부의 광대분장을 한 아서 플렉을 보면, 그는 불량배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반항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총을 가지게 되고, 광대분장을 한 아서는 총으로 살인이라는 악행을 저지른다. 광대분장을 하지 않은 아서는 착하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는 신문이나 광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아서 플렉이 아닌 살인자 광대이다. 동일하지만 분리되어 있다. 

 아서는 자신의 과거의 비밀을 듣고 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한다. 그는 예전보다 더 힘있고 대담해져 있다.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비웃는 경호원의 목을 조른다.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서 플렉은 죽이지 않는다. 아버지로 추정되는 자에게 맞을 뿐이다. 

 그가 아서 플렉으로서 처음으로 나쁜 짓을 한 것은 그의 어머니에게서다. 아서는 자신을 선과 악에서 해방시키고 혼돈을 창조했다. 살인자 광대가 그랬던 것처럼 혼란을 불러 일으킬 뿐 아니라 혼돈 그 자체이다. 그는 더이상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살기로 한다. 뒤통수 친 동료에게 복수를 한다. 이제 그는 더이상 아서가 아닌 광대 분장을 한 '조커'이다. 선과 악, 아서와 광대가 모두 뒤섞인 혼돈, 그것이 조커이다. 

 

2. 총이 향하는 대상

 아서가 총을 처음 쏘았던 것은 긴 소파 옆의 1인용 의자를 향해서였다. 그 자리는 '부모'이다. 어머니의 자리, 그리고 아버지처럼 여기는 머레이의 자리. 그가 머레이쇼의 연습을 할때 머레이는 그 1인용 의자에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조커는 머레이쇼에서 결국 같은 방향으로 총을 겨눈다. 그리고 부모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 누구도 그의 부모가 아니었다. 

 

3. 고통스러운 웃음

 아서플렉은 계속해서 웃는다. 울고 싶을 때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평소에 웃음이라고 하는 건 즐겁고 재미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아서에게 웃음이란 그저 고통일 뿐이다. 

 영화에서 아서는 눈물 보다는 웃음을 더 많이 보여줬다. 고통스러운 웃음, 그려진 거짓 미소. 사랑으로 인한 미소도 사실은 거짓이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아서는 삼키듯 오열하며 조커가 되어간다. 감정이 드러난 후 아서는 조커로서 해방된다.  

  후반부에서 아서는 웃음을 그려 넣는다. 이는 혼돈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찾은 조커의 기쁨이다. 마지막의 조커는 농담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웃는다. 이제 웃음은 그에게 고통이 아니다. 새로운 정체성이다. 

 

4. 밑바닥 인간들의 반란의 상징

 영화의 첫장면. 광대분장 중인 아서 플렉의 뒤로 라디오 뉴스가 흐른다. "환경미화원의 파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경미화원은 보통 가장 바닥의 일이고, 정말 필요한 일을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존재 자체에 대해 대부분 느끼지 못한다. 이는 밑바닥 인간들이 고담시에서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반란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조커는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상징이 된다. 

 상류층을 대표하는 토마스 웨인은 이러한 대중들의 반감을 산다. 그는 용기있고 옳은 발언을 했을 뿐이다. '어떤 종류의 겁쟁이가 이런 끔찍한 짓을 할까요? 마스크 뒤에 숨은 자입니다. 바로 그들(죽은자들)이 더 부자인 것을 시기한 자입니다.' 토마스 웨인은 대중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거만한 부유층에게 복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대중들에게 부유층의 토마스 웨인의 발언은 '너는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겁쟁이이며, 그저 남의 부를 시기하는 시시한 녀석'이라고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조커는 혼돈과 불안정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이는 빈곤하고 화가 가득한 슬럼가의 대중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을 대신해서 정의로운 깨끗하며 여유로운 상류층과 대비될 것이다. 

 

5. 찰리 채플린, 희극과 비극

 아서는 손가락을 넣어 힘껏 미소를 만든다. 어찌나 강하게 당겼는지 눈물이 흐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울고 있다. 인생은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광대분장을 한 아서의 커다란 신발과 모자, 단조로운 피아노의 배경음악은 무성영화 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연상하게 한다.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 광대 신발을 신고 뛰고 춤추는 모습도 그렇다.  전반적으로 시대의 광대였던 채플린을 모티브로 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다. 

 중반부의 찰리 채플린 필름을 보는 상류층 사람들은 아이러니하다. 그들 안에 아서 플렉이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짧게나마 순수하게 찰리 채플린의 필름을 즐기는 아서는 마치 광대이면서 상류층 중 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찰리 채플린이 자신이라고도 여기는 듯 하다. 

 조커는 희극이자 비극이다. 인생과 마찬가지다. 혼돈스러운 것도 인생과 같다. 조커는 밑바닥의 인생 그 자체이며, 조커라는 캐릭터로서 받아들였다. 그는 다시 태어났다. 

 

 

그 외에도 재미있는 점은 많았지만, 일단 가장 강하게 느꼈던 것들을 위주로 끄적여 보았다. 

병원에서의 슬랩스틱이나 개리가 겁에 질려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장면은 일부러 어울리지 않는 코미컬 코드를 넣어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 전략이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계속 여운이 남고 또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캐릭터 조커가 아닌 인간 조커를 본 듯하다. 2편은 안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