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기다렸던 영화 작은 아씨들. 예고편과 포스터만으로도 무척 기대되었다. 원작 소설 작은아씨들은 상당히 여러번 읽어서 내용은 다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재해석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다르다'였다. 원작과 기존의 공식들을 해체해서 재편집한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이라고 해야 할까.
1. '현재'와 '회상', '현실'과 '환상'
영화는 원작이나 그 간의 영화들처럼 자매들의 어릴 적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네 자매 중 둘째 조는 뉴욕의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팔러 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아픈 베스를 간호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회상하듯 어릴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비주얼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마치 가(家)의 현재와 회상 부분의 씬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파랗고 약간 우울한 분위기의 현재에 비해 회상은 따뜻하고 밝은 빛으로 가득하다. 좀더 차분하고 웃음기 없는 현재, 웃음이 가득한 회상은 극 중 현재에 존재하는 어른이 되어 버린 자매들의 마음을 대비해서 잘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 '현재'와 '회상'은 '현실'과 '환상 (조의 소설)'로 바뀌어져 간다. 조의 미래의 남편이 되는 베어 교수가 찾아오고 그를 찾으러 마차를 타고 달려가는 부분, 대고모가 남겨준 플럼필드 학교에서 아버지의 생일을 맞는 장면은 자매가 어른이 된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회상'과 같이 밝고 따듯한 분위기로 변해 있다. 이에 비해 조가 다시 찾은 뉴욕의 출판사는 여전히 푸른 분위기이다. 이는 동시간이 아닌 '현실'과 소설 속 '환상'이라는 개념으로 영화가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2. 네 자매가 원하는 것, 당신이 원하는 것
이 영화는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영화라기 보다는 여성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대놓고 보여 주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우리에게 '여성인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 메그는 배우가 되기를 막연히 희망했지만, 화려한 무대 위의 삶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성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엄마'로서의 삶, '주부'로서의 삶은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지 않았을까. 엄마, 주부로서의 여성은 지위가 낮다고 스스로를 폄하하지는 않았을까. 친구의 부추김에 비싼 옷감을 사놓고 '내가 미쳤지'라고 이야기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운 건 아무리 두 아이의 엄마라고 해도 20대 초반의 여성인 메그의 마음이 21세기 여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조는 자신의 글로 돈을 벌기를 바라면서 아들처럼 아버지를 이어 가족을 부양하기를 원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경제적 무책임에 질려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것에 열정을 가진 그녀는 결론적으로 원하는 대로 된다.
- 막내 에이미는 영화 초반부터 자신의 어중간한 재능에 대해 알아채지만, 야심만만한 그녀는 유명한 화가가 되어 인정받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아니, 부자남편을 얻고 싶어한다. 그것이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가족을 위한 것도 있지만 본인이 안락하게 살고 싶은 것이고, 그것을 이루려면 부자 남편을 얻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나는 여성이 안락하게 살기 위해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현재에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 베스는 자신의 생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고 그저 살아있는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했다.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조를 통해, 다른 가족들을 통해 알리고 싶어했다. 그녀는 조의 작품 속에서 계속 살아 남는다. (작품 상에서 에이미의 외동딸 이름이 Bess다. )
그리고 그 자매들은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 로 끝나지는 않을 테지. 사랑과 가정을 선택한 메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릴 것이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조는 창작이라는 항상 외로운 길로 걸어갈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속 썩이는 플럼필드 학교 학생들... -_-) 에이미는 부자지만 철없는 남편 때문에 고생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원하는 길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을 것이고, 다양한 인간의 마음이 어우러지는 것,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인생'이라고 알려준다.
3. 여성의 이야기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찌질하다. 아버지와 메그의 남편이 되는 존 브룩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로리는 나이를 먹어도 어린 남자아이 같다. 대쉬우드 편집장은 전형적인 꼰대이고 프리드리히 베어 역시 글에 대한 평가는 신랄하게 하면서 감정에 대한 고백도 제대로 못하는 소심남이다.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서 이 영화는 여성이 모든 것을 이끌어간다고 볼 수 있다. 조는 로리의 고백을 '거절'한다. 에이미는 로리에게 '고백'한다. 마치 부인은 항상 부재중이었던 남편을 은근 타박한다. 메그 역시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본인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리고 평범한 자매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 가장 예쁘다고 나오는 메그역의 엠마 왓슨도 극중에서 특별히 튀어 보이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유명하고 예쁜 여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위노나 라이더/클레어 데인즈/커스틴 던스트/캐서린 햅번/엘리자베스 테일러 등등) 이 영화를 예쁘게 만들기 보다는 여성 모두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았고, 그 점이 관객들에게 공감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4. 캐릭터들의 실제와 허구
감독은 대본을 쓰면서 실제 알콧 자매들에 대한 캐릭터도 같이 스터디한 것 같다.
먼저 항상 철없고 얄미운 막내였던 에이미에게 성숙하고 현실적인 캐릭터를 넣어 준 것이 밸런스적으로 무척 좋았다. 얼음에 빠져서 죽을 뻔 했는데도 감기도 안 걸리고 ㅋㅋ 싫은 일은 잘도 피해나가는 에이미는 사실 실제 루이자 메이 알콧의 막내 동생 메이 (May, 에이미 Amy라는 이름이 여기서 온 거다) 캐릭터에게 느낀 묘한 얄미운 느낌을 그대로 표현했다. 루이자와 메이는 서로 재능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자주 싸웠고 메이는 재능에 대해 루이자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이걸 표현한 플로렌스 퓨의 연기도 무척 좋았다.
루이자 메이 알콧은 조가 로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로리와 에이미를 결혼시키고, 뜬금없는 베어 교수와 조를 결혼 시킨 것은 당시의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들을 비꼰 것이다.
메그의 모델인 루이자의 언니 애너는 실제로 배우가 되길 원했었고, 남편도 연기자였으며 결혼 후 연기를 그만두었다. 루이자는 동생 리지 (베스)의 사망과 애너의 결혼으로 자매간의 관계가 다 깨질 것으라며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베스의 이야기가 이렇게 중요하게 다뤄진 영화는 없었다. 영화에서 베스는 조가 글을 쓰게 만드는 모멘텀이다. 그리고 소설 속의 주요장면인 베스와 조의 해변가 에피소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을 보라. 이제까지 베스는 주어지는 모든 것에 행복하기 원하는 착하고 수줍은 소녀로만 표현되었다.
이렇게 감독은 실제 알콧의 삶과 소설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뒤섞음으로서 실제와 허구를 잘 이용했다.
5. 허구로서의 로맨스
로맨스 부분이 굉장히 뜬금없다. 갑자기 로리가 에이미를 좋아하고, 조가 베어 교수를 좋아하고... -_- 좋아하게 된 맥락이 전혀 없다. 이것은 감독이 로맨스 부분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런 부분은 소설 속에서 존재하게끔 만들어 버렸다. 가장 이해가 가는 건 메그와 존의 연애관계 뿐이다.
왜냐하면 에이미와 로리, 조와 베어 교수의 로맨스는 실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작은 아씨들 소설이 유명해지고 한참 후 38살에 결혼한다. 조 역시 결혼으로 이어진 로맨스는 없었다. 소설을 썼던 당시에 존재했던 로맨스는 애너와 존 프랫 뿐이었다.
6. 대립점과 유사점
영화에서 조와 에이미의 관계처럼 대립되면서 유사한 관계가 있는데, 어머니인 마미 마치 부인과 대고모인 미스 마치이다. 모든 걸 퍼주는 가난한 마치 부인과 인색한 부유한 독신인 대고모는 완전히 다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주는 점에서 보면 다르면서도 같다.
7. 아쉬운 점
어른들 캐스팅이 좀 어색했다. 특히 로렌스 아저씨는 후반부에서 좀 걸리적 거리는 느낌이었다. 로라 던은 마미 마치 부인이기에 너무 모던했다. 하지만 이 역시 영화적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분명 보람도 있고 고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써 당신은 여성 그 자체가 된다. 여성은 누구나 아름답고 존재의 가치가 있다.
물론 남성도.
***
추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신경쓰이는 것 하나.
알콧 자매의 막내 메이는 원래 애비게일 메이 알콧이다. 그녀가 자신을 메이로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 루이자 메이 알콧에도 메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어서 의아해 할까봐 알리는 짧은 지식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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